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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말씀 묵상/누가복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아버지 이야기 / 누가복음 15장 11-24절 / 매일성경 말씀 묵상 큐티

by Inch_J 2020.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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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 이야기

본문: 누가복음 15:11-24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예수님은 말씀을 들으러 나온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식사하고 교제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며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은 목자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한 명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가르치십니다(눅 15:1-10). 이제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시는 동시에 자신들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그 사람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는 것을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하는 패륜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급하고 무례한 둘째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그의 몫의 재산을 미리 내어줍니다. 비유를 듣는 청중들에게 아버지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물을 받은 둘째 아들은 가족 간의 관계도 끊어버린 채 먼 나라로 갔습니다. 당시에는 기근과 전쟁으로 시달리던 유대 땅을 떠나 경제적으로 더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무역 중심지로 이주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분별력 없이 방탕하게 살며 재물을 낭비하고 결국 모든 재산을 탕진해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한 뒤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고 둘째 아들을 궁핍해졌습니다. 이 아들은 유대인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구제 제도에서조차 벗어나 결국 이방인에게 합류해서 거기 머물러 살며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수치스러운 노동을 하면서도 궁핍을 면하지 못하고 돼지들의 먹이인 쥐엄나무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그조차 먹을 수 없었습니다(눅 15:11-16).

 

  작은 아들은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상황이 결코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돼지 사료도 먹지 못할 만큼 궁핍해서 굶어 죽을 처지에 놓여 있지만, 자신의 아버지의 품꾼들은 양식이 풍족하다는 것을 생각해냅니다. 둘째 아들은 그곳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품꾼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유대인 청중들은 그가 살아온 방탕하고 부정한 삶과 아버지의 재산의 1/3을 탕진해버리고도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돌아온 아들을 뻔뻔한 행동으로 여겼을 것이며, 아버지가 패역한 아들을 때려 내쫓거나 돌로 쳐 죽이는 일도 합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눅 15:17-19).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아들을 보고 아들이 준비한 고백을 듣기도 전에 측은한 마음으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연장자인 유대인 남성이 겉옷의 옷자락을 바닥에 끌며 뛰어가는 것은 그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일이이었지만 아버지는 체면보다 아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권위를 드러내는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가 아들에게 입히고 손에 가족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끼우고 당시 보통 종들은 신지 않던 주인의 신발을 가져와 아들에게 신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죽었던 아들이 다시 생명을 얻을 일에 대한 기쁨으로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축제를 벌였습니다(눅 15:20-24).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패역하고 끔찍한 것이며, 죄인인 우리의 형편이 얼마나 궁핍하고 비참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죄인이 그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생생하게 보게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결코 하나님의 의무로 여기거나, 자연스러운 것, 마땅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거나 용서하시거나 오래 참으실 이유가 없으시며, 우리의 회개는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먼저 구원을 약속하시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마침내 죄인인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은혜를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애굽에 유배되어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그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지만, 끝없는 불순종과 죄악으로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유배 생활을 하였고 포로에서 귀환한 뒤에도 여전히 이방인들의 통치 아래 유배상태에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역사적으로나 영적으로 해방되는 새 출애굽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참된 포로 귀환과 해방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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