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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말씀 묵상/누가복음

복음을 사모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 누가복음 10장 25-42절 | 매일성경 말씀 묵상 큐티

by Inch_J 2020.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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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을 사모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본문: 누가복음 10:25-42

 

<본문>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마르다와 마리아>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해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일어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 교사에게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되물어보십니다.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대답한 내용이 옳고 정말 율법 교사가 그 말씀대로 산다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0:25-28).

 

  그런데 율법 교사는 이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할 때 ‘내 이웃’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의 그의 동료들이나 친척들을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답변을 들은 뒤 자신이 그 사람들을 다 어려서부터 사랑했다고 고백함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 교사가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바르게 이해하고 대답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십니다(눅 10:29-29).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실제로 바위가 많은 사막지대였던 여리고로 가는 길은 강도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입니다. 강도는 그 사람의 옷을 벗겼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때린 뒤 버리고 갔습니다. 그때 한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가다가 죽을 처지에 놓인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는 제사장은 성전에서 자신의 직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사장은 유대 사회에서 귀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자 상류층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유대의 경건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을 의도적으로 피해서 지나갑니다. 만약 제사장이 쓰러져 있던 사람이 자신의 동료, 자신의 이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그를 구해주어야 의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쓰러져 있는 사람이 죄인이나 불경건한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또, 제사장이 그 사람을 돌보는 동안 죽거나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 제사장은 정결 예법에 따라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제사장이 어떤 이유로 쓰러진 사람들을 피해갔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는 제사장이라 하더라도 사랑과 긍휼을 행하지 않고 죽어가는 자를 방치했을 때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눅 10:30-31).

 

  이어서 한 레위인도 그곳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했지만 역시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제사장보다는 낮은 계급이었지만, 성전의 문지기의 역할, 성전을 관리하고 물품을 운반하는 일, 찬양을 인도하는 연주자의 역할을 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긍휼을 행하지 않았습니다(눅 10:32).

 

  그리고 여행길을 가던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다가다 그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유대교에서 높은 사회적 계급을 차지한 사람이었다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개와 같이 천하게 여기고 원수와 같이 적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의 이주정책으로 인해 혈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혼합된 민족이었을 뿐 아니라, 모세오경을 제외하고 남유다 왕국과 관련된 역사서와 선지서 성경을 모두 부정했고 1세기에는 친로마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의 성전 의식에서 배제되었고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 없었으며,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처소인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을 파괴한 역사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의 상처에 포도주를 부어 소독을 하고 기름을 바른 뒤 싸매줍니다. 기름과 포도주는 성전 예배에서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기에 성전 밖에서는 이웃 사랑의 율법을 전혀 행하지 않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타고 왔던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줍니다. 다음 날 아침 사마리아 사람은 그 주막의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고 혹시 이 사람을 돌보는 일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말합니다(눅 10:33-35).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들은 율법 교사에게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도 가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0:36-37).

 

 

  그 후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하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르다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혼자 외롭게 여러 가지 많은 일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이 자신을 혼자 일하도록 내버려두신 것과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게 화가 나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라며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마리아에게 나를 도와주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눅 10:38-40)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을 하느라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그러나 몇 가지만, 혹은 한 가지만 해도 충분하다. 마리아는 이 좋은 몫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염려하며 고생하는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것은 마르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것이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가장 중요하고 올바른 일이며, 그 일에 우선을 두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10:41-42).

 

 

<메시지>

 

  율법교사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기준으로 누가 자신의 이웃이 될 자격이 있고, 자신이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를 결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을 통해 이웃은 자신이 아닌, 자신을 통해 섬김을 받는 사람의 기준에서 판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웃은 ‘우리가 반드시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위해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가장 좋은 일을 우선에 둘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나타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을 갖고 있고 활발하게 예배, 기도, 성경공부, 봉사와 같은 종교적 의무와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전혀 반영되지 않고 오히려 비성경적이고 복음과 반대되는 자기 의와 자랑, 고집과 이기심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계급화하고 서열화시키고 교회 안에서조차 혐오와 차별을 행하는 악한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교회라고 믿을지몰라도 결코 사람들에게 참된 이웃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웃도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형식적 제사와 종교행위를 통해 성취한 자기 의를 쌓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겸손히 그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로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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